전남 신안군청의 공무원 A씨는 26년째 공직생활을 하는 베테랑 공무원이다. 1989년 9급 공무원으로 임용된 후 쭉 신안군청에서 근무해 왔다. 하지만 그는 15년째 6급에 머물러 있다. 2001년 승진한 것이 마지막이다. 20명 안팎 있는 신안군의 5급 공무원 자리 중 약 20%를 전남도청 출신 공무원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A씨처럼 진급이 가로막혀 15년 이상 6급에 머물고 있는 군청 공무원은 신안군에서만 10명이 넘는다. 공직생활을 30년 넘게 했지만 여전히 6급에 머물러 있는 공무원도 있다. A씨는 “안 그래도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은 인사적체에 시달리고 있는데 몇 안 되는 사무관 자리를 도(道)에서 가져가 적체가 더 심해지고 있다”며 “5급 자리를 내부 승진자로 채워야 하급 공무원들도 연달아 승진 기회를 얻는데 승진길이 막히니 군청 출신 공무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다”고 했다.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이 광역자치단체에서 내려온 ‘낙하산 인사’에 승진이 가로막혀 퇴직할 때까지 6급 이하의 하급직에 머무르고 있다. 광역시 및 도로 구성되는 광역자치단체는 시·군과 교류하는 인사교류 제도를 이용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승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남 신안군의 공무원노동조합은 지난 11월 중순 행정자치부를 항의 방문했다. ‘광역자치단체가 기초자치단체의 부단체장을 내부 인사가 아닌 광역자치단체의 인사로 내리꽂는 바람에 기초자치단체가 인사교류 시스템에 관여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올해에만 두 차례 발표했지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좁은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의 5급 승진길이 더 좁아진다는 것이 신안군 공무원노조의 주장이다.
실제로 광역자치단체 사무관들이 기초자치단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말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공노총)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전남도청의 5급 공무원 중 53명, 경북도청의 5급 공무원 중 47명이 관할 시·군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군의 부단체장(4급 이상)은 전원이 도청 출신이다. 강원·제주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전국 대부분의 기초자치단체에 광역자치단체 출신 사무관들이 내려와 있다. 2010년에는 경북 포항의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포항시는 시에서 근무하는 도청 소속 5급 공무원들을 돌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충청남도는 5개년 계획을 세워 시·군에 내려와 있던 도청 출신 사무관 전원을 도청으로 회귀시켰다.
인사교류제도를 통해 기초자치단체에 온 도청 공무원이 1~2년 뒤 도청으로 돌아가면서 빈자리에는 도 직원이 다시 내려온다. 만약 도청 공무원이 시나 군에서 퇴직한다면 시·군청에서 내부 직원들을 승진시켜 자리를 채울 수 있지만, 대부분 도청으로 돌아가 퇴직하기 때문에 시에서 근무하는 도청 직원의 숫자는 꾸준히 유지된다. 이처럼 도에서 내려와 시·군에 근무하는 5급 공무원은 전남과 경북을 합치면 100명에 달한다.
사무관 승진이 늦춰지는 것은 연쇄적인 인사적체로 이어진다. 시·군에서 사무관은 장(長)급 인사들과 일부 서기관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공무원이다. 도청 사무관 한 명이 되돌아가면 6급이 5급으로, 7급이 6급으로 승진하면서 시·군 직원 네 명의 승진길이 열린다. “도청 출신 사무관 4명에 4급 공무원인 부군수까지 합치면 총 21명의 신안군청 직원이 도청 공무원들 때문에 승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신안군 공무원노조의 설명이다.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 간의 직제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중간급 관리자의 경험 부족도 문제다. 전남도청에서는 일반적으로 5급 공무원이 계장 보직을 받고 6급은 일반 직원이다. 반면 신안군에서 5급 공무원은 과장 보직을 받는다. 도에서 5급으로 승진한 공무원이 바로 시·군으로 교류되면 도청에서는 직원으로 근무한 공무원이 계장 보직 경험 없이 바로 시·군의 과장 보직을 받는 셈이다.
시·군 목소리 반영 안 되는 인사교류제도
정부는 공무원을 어느 한 기관이 아니라 담당 업무의 성격이 비슷한 다른 기관에 이동시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일하게 하는 ‘교류형 인사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행정기관 상호 간의 협조체제를 증진시킨다는 이유에서다.
행정자치부는 시·도 간 인사교류 계획을 심의하기 위해 광역자치단체에 인사교류협의회를 두게 하고 있다. 인사교류협의회의 위원장은 행정부지사가, 위원은 각 시와 군의 부단체장이 맡는다. 하지만 시·군의 부단체장은 도청 출신 공무원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상 전원이 행자부나 광역자치단체 출신 인사인 셈이다. 기초자치단체의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게 돼 있는 구조다.
원칙적으로는 기초자치단체의 장이 도에서 요청하는 인사교류를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은 문제다. 광역자치단체가 기초자치단체의 예산이나 권한 배분에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혁 신안군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기초자치단체장은 광역자치단체의 인사교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다”며 “기초자치단체에 대한 감사권과 예산권을 가진 광역자치단체에 미운털이 박히면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남도청은 시·군이 원해 이뤄지는 인사교류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전남도청과 신안군청 사이의 인사교류를 담당하는 전남도청 총무과의 김경호 과장은 “인사교류는 항상 1:1 교류를 유지해 왔고 시나 군에서 교류를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며 “광주가 가까워 생활여건이 좋은 지역은 오히려 도에서 공무원을 보내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아무리 감사권이 있어도 인사는 별개 문제고 지방자치제가 이미 정착된 지 한참인데 도청이 그런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며 “얼마 전 신안군에서 인사교류제도를 통해 전남도청으로 온 5급 공무원은 4급으로 승진하기도 했다”고 했다.
시·도 간 인사교류에 관한 지침을 만들어 운영하는 행자부는 이 같은 현상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시·도 간 인사교류를 총괄하는 행자부 지방인사제도과의 양홍주 과장은 “전국적인 실태를 파악한 결과 기초자치단체에 온 공무원들이 광역자치단체에 다시 올라가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다”며 “도청 주변이 생활환경은 좋지만 물가가 비싸고 업무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문제제기가 많은 경북을 예로 들며 “도에서 내려간 공무원이 다시 도청에 돌아가지 않으려 해 약간의 불균형이 발생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내려간 공무원들이 퇴직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처럼 엇갈리는 기초자치단체와 광역자치단체의 입장에 대해 한국행정연구원의 박정호 부연구위원은 “시장이나 군수는 선거를 통해 주민들이 직접 뽑은 사람이므로 기초자치단체에 대한 인사권은 최대한 보장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어지간해선 돌출행동을 하지 않는 지자체 공무원들이 탄원을 할 정도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고 장기화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광역자치단체의 힘과 행자부의 방관에 기초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승진길은 캄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