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손 비빈 당신, 잘해봐라?
‘일반미’가 부러운 ‘정부미’… 공무원들은 왜 인사철마다 참을 수 없는 환멸을 느낀다
‘정부미’ 김아무개(47·6급 지방 공무원)씨는 ‘일반미’ 친구들이 부럽다. 정부미는 공무원이고, 일반미는 민간인을 가리키는 공무원 사회의 은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하루 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친구들은 김씨를 두고 ‘역시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부러워했지만 김씨 속은 새까맣게 썩고 있다.
손발과 양심을 묶는 인사제도
사진/ 웃기 연습하고, 세금 떼먹다 잡혀가고, YS에게 상받고, DJ에게 강연듣고.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바쁘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한겨레21 강재훈 기자·한겨레 진천규 기자)
그는 출신과 지역, 학교 등에 따른 줄서기와 편가르기에 밀려 계속 승진에서 미끄러졌다. 후배가 벌써 그를 앞질러 승진했다. 지난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뒤의 최근 인사에서도 또 물을 먹었다. 그는 새로 당선된 자치단체장이 같은 고향 출신을 노골적으로 우대한다고 주장했다. 마음 같아서는 “열심히 손 비빈 당신… 잘해봐라”라고 외치고 이 조직을 떠나고 싶다.
민간 회사들도 인사 때마다 줄서기나 잡음이 있지만 ‘인사가 만사’인 공무원 조직은 정도가 휠씬 심하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 진 뒤 퇴임을 앞둔 단체장이 인사를 통해 ‘내 사람 챙겨주기’를 하는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난다. 지난 6월 17일 전남 고흥군에서는 56명을 승진시키는 등 전체 공무원 753명 가운데 117명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흔히들 공무원 조직을 ‘인재의 무덤’이라고들 한다. 실제 현직 공무원들은 이 말을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공무원은 시작할 때는 또래에서 평균 이상의 지적 능력과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직 안에 들어와 시간이 가면 생각과 행동이 굳어지고 무사안일과 면피주의, 줄서기에 능한 ‘공무원’이 돼버린다. 이렇게 공무원들의 손발과 양심, 자존심을 묶는 것은 인사제도 때문이다. 공무원의 승진과 전보 같은 인사는 자치단체장과 기관장의 고유권한이다. 인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단체장에게 공무원들은 절대 충성할 수밖에 없다.
98년 10월, 서울시 어느 고위간부가 한 방송사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산비탈 동네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환경 미화원’을 ‘체험’해본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인기 연예인이나 장관 등 이름과 얼굴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등장하곤 했다. 당시 새벽 4시부터 촬영이 시작됐고, ‘귀가지시’를 내렸음에도 일부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 눈도장을 찍느라 바빴다. 민원인들은 얼굴 보기도 어렵다는 사무관 한명과 비서 구실을 하는 직원이 땀 흘리는 간부를 위해 물수건을 든 채 10m 거리를 두고 줄곧 수행하느라 진땀을 뺐다.
인사철이 되면 ‘로비전쟁’이 벌어진다. 3년 전 서울시 인사 때 한 과장급 공무원이 자신이 바라는 보직을 얻기 위해 현직 장관이 전화를 걸어오고, 청와대 고위층이 시장실을 찾아오는가 하면 시민단체까지 동원해 압력을 행사해 뒷말이 무성했다.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상사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공무원은 “고위직뿐만 아니라 6~7급 인사 때 들어오는 청탁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다. 몇 다리 건너면 인연이 닿는 우리 사회의 특성상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인사 때면 직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공무원치고 각종 보고서 작성 때문에 속끓여 보지 않은 공무원이 없다. 90년대 들어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도입되면서 타자기로 보고서를 작성한 시절보다 엄청나게 편리해졌다. 하지만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상사들은 변하지 않았다.
한 사무관은 “계선을 따라 보고서가 쭉 올라가지만 대부분 5급 사무관이나 6급 주사들이 기안한 내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중간에 결재권자들은 제목이나 글자 크기를 지적하고 순서를 바꾸라고 한다. 가끔 오탈자를 잡아내기도 한다. 정책 방향이나 대책 같은 근본적 내용에 대한 지적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내용 알찬 보고서가 아닌 보기 좋은 보고서를 만드는 데 신경을 쓴다.
김대중 정부의 첫 번째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김정길씨는 <공무원은 상전이 아니다>에서 공무원의 놀라운 ‘순발력과 눈치’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98년 3월 초 서울 여의도 개인 사무실에서 장관으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청와대로부터 받은 지 10분 만에 행자부 간부들이 찾아왔다. 취임사에 관용차, 결재서류에 ‘행정자치부 장관 김정길’이라는 명함까지 준비돼 있었다.
김옥두 민주당 의원은 정책보고서를 통해 주변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처신하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공무원을 10개 유형으로 분류했다.
권생권사(權生權死)형은 권력층에 대한 아부와 로비를 일삼는다. 하이에나형은 각종 재량권과 규제권을 남용해 뒷돈을 받고 돈벌이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 또 뇌물 먹이사슬을 엮어놓고 각종 감사나 수사 때 “불어버리겠다”고 엄포 놓는 물귀신형도 있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변신하는 카멜레온형, 늘 불평만 하는 투덜이형,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로봇형, 복잡한 일은 다른 부서로 떠넘기는 핑퐁형, 새로 부임한 장관까지 길들이는 터줏대감형, 지연·학연 등으로 얽혀 인사와 이권에 개입하는 마피아형 등이 있다.
공무원의 역사는 ‘50년 굴종의 역사’
공무원노조쪽은 해방 이후 공무원의 역사를 흔히 ‘50년 굴종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잘못된 역사의 뿌리는 1945년 해방 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 닿아 있다.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제의 앞잡이들을 공무원으로 많이 등용하면서 비뚤어진 공무원 역사는 시작됐다.
권인석 상지대 교수(행정학과)는 “일제 관료 출신 공무원들은 상대적으로 행정 경험이 많은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하기 위해 ‘공무원은 주인이 누구든 열심히 섬기기만 하면 된다’며 상부에 대한 충성심과 고참 우선순위를 강조하며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이러한 과정은 제1공화국에 이어져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한국 행정문화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설명한다.
“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대통령과 정부의 업적을 국민에게 선전해야 하며, 이 같은 일이 싫은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
1959년 3월, 이승만 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5부 장관을 바꾸면서 입각한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취임사에서 내놓고 밝힐 정도로 공무원은 관권부정선거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짧은 제2공화국을 거쳐 박정희 정권의 제3·4공화국 때는 공무원들의 부침이 심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초기에는 경제개발의 주도 등으로 꾸준히 국가기구를 넓혔고, 공무원의 신규 채용과 승진을 통한 신진대사가 비교적 활발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군 장성 출신이 행정부와 국영기업체의 최고책임자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고, 장교 출신들을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유신 사무관’ 제도가 도입됐다. 공무원들 사이에 파벌과 군대식 행정문화가 본격화됐다. 한 예비역 장교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남 진해 별장에 내려와 낚시를 하면 잠수에 능한 해군 요원들이 낚싯바늘에 물고기를 꿰어주는 등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다”고 말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대기업 등이 발전하며 공무원 임금이 상대적으로 적어졌고, 인재들이 대기업 등 민간분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공무원의 재량권이 늘어났고 공직자 비리도 덩달아 증가했다. 제5·6공화국 들어 공무원들의 승진속도는 더욱 느려졌고 사기업과 임금 격차가 계속 벌어져 공무원들의 자긍심과 국가관은 약화됐다.
원칙에 입각한 올곧은 공무원의 꿈틀거림도 있었다. 90년 5월 감사원 감사관 이문옥씨는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가 재벌의 로비로 중단된 사실을 <한겨레>에 공개했다가 비밀누설죄로 구속 기소됐다.
권위주의 정권 때까지는 관권선거가 판을 쳤다. 읍·면·동에서는 행정전산망을 이용해 유권자의 경력과 직업 등을 조회하고 성향을 분석했다. 관내 유력 인사는 친여·부동표·친야 성향에 따라 O·△·X로 표시하고 선거 10일전부터는 득표 예상보고를 상급기관에 해야 했다. 권위주의가 약화된 김영삼 정권 때 공무원들은 사정과 개혁 속에 복지부동했다. 김영삼 정권 때 지방자치가 실현되고 공무원에 대한 민간위탁 교육이 이뤄지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끝무렵인 요즘 공무원은 뭘 하고 있을까. 한 공무원은 농담삼아 현재 상황을 ‘낙지부동’이라고 했다. 김 대통령의 출신지역인 목포 특산물 낙지에 빗댄 표현으로, 공무원들이 낙지처럼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